이름 | 업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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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천민 | 자는 각보, 임진왜란 때 최문병과 더불어 영천성 탈환에 공을 세움 |
김응룡 |
경상북도 경산군 남산면 반곡 ( 盤谷 ) 출신인 김응광 (金應光)님은 상산김씨( 商山金氏)로 아버지 김봉린( 金鳳麟 )과 어머니 완산이씨( 完山李氏 ) 사이에서 서기1555년 5월 9일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字 )는 명중(明仲)이고, 호는 우은 (愚隱) 이다. 부인은 곡강최씨(曲江崔氏)이다.임진왜란 이후에 김응룡( 金應龍 )으로 개명(改名)하였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월7일 최문병(崔文炳)이 자인(慈仁) 울곡리(蔚谷里)에서 의병을 일으켰는데, 이 때에 반곡과 가까운 울곡리로 달려갔다. <용사세강록(龍蛇世講錄)>에는 이때에 참전한 용사의 이름이 실려있다. 릉(陵)은 경상도 경산군 고산면 이천동(일명 배내 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
최문병 | 최문병 의병장 안장, 보물 제747호, 경산군 자인면 원당리 243
최문병이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 지역 장사들이 의병장이 되어 왜적을 물리칠 때 사용하던 말의 안장이다.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안장에 새겨진 무늬가 아름다우며 아주 실용적으로 만들어져 있다. 더욱 더 소중한 것은 나라가 어려움을 당했을때 용감하게 의병을 규합하여 왜적과 싸운 의병장이 사용한 말 안장이라는데 있다. 우리도 이와같은 호국정신을 본받아 조국을 지켜야 할 것이다. |
박응성 | 호는 매헌, 무광에 급제, 오위도총부도사(종5품)을 지냄 |
박응량 |
매헌 박응성의 종매, 성주사원 전투에서 공을 세움 박응량은 광해군 1년(1609)의 울산부 호적대장에는 온양리(지금의 오양, 오산, 서생, 청량의 4개 읍면에 걸쳐 있었다)에 살고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울산의 모던 전투에는 박응량의 활약상이 없는 곳이 없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는 도산성 전투에서 6만의 병사를 이끌로 선봉으로 나섰다고 전해진다. 박응량이 가졌던 관직으로는, 주부(主簿), 회원통정(會員通政), 훈련원첨정(訓鍊院僉正) 이 세가지로 전해진다. 또한 그는 임진왜란의 전공으로 종형 박 응성(朴應成)과 더불어 전공을 세원 선무원종공 (宣武原從功) 3등에 녹훈되었다. |
변함, 변호, 변문 |
삼의사(三義士), 고산서당을 창건 변함(變咸)과 변호(變護)는 일찍이 서로 이어 김제(金堤) 훈도(訓導)로 재임한 바 있는데 퇴직 후 고향에서 후진들에게 강학(講學)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그리고 또 변함(變咸)과 변호(變頀) 형제는 고을 선비들과 힘을 모아 고산서당(孤山書堂)을 창건하기도 하였다. |
진섬 | 자는 여명, 호는 성재, 남천면에서 왜적에 저항하였고, 욱수동 망월산성에서 항거 |
최응담 | 경산 의병대장, 청도 접경지 성현.남천 금곡동에서 항전 |
하양현 창의(倡義)8의사 |
신해, 황경림, 김거, 허대윤, 허경윤, 박능정, 박붕, 허응길 |
이 간 | 자는 공직, 호는 괴암, 괴암일고 지음 |
박응득 | 인조 14년,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항전 |
서사선 | 자는 정보, 호는 동고, 인조반정후의 공신 포상에 대한 불만으로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한양을 점령하자 의병을 일으켜 진압 |
김시성 | 자는 문원, 호는 금포, 병자호란 후 청나라에 인질로 간 봉림대군 호위, 삼도통제사 지냄 |